<내일시론>호주제 폐지는 시대의 요구였다(문창재 2005.03.04)

지역내일 2005-03-04 (수정 2005-03-04 오후 1:28:30)
호주제 폐지는 시대의 요구였다

호주제를 폐지하기로 한 국회결정은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인 조치라 할 수 있다. 폐지논의 30여년 만이다. 너무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다.
2일 국회를 통과한 호주제 폐지 민법 개정안은 한국인 개개인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姓)을 간다”는 말이 더 이상 욕이 아닌 세상을 살게 된다.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도 있고, 필요하면 성을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성을 ‘출가외인’이라 부르면서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려던 사회관습에도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여성의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유교적 가치관은 형해(形骸)만 남게 될 것이고,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는 가족제도와 관념도 사라질 것이다.
민법 개정안은 호주제 폐지만 규정한 것이 아니다. 호적이 없어지는 대신 모든 국민이 하나씩 독립된 신분등록부를 갖게 된다. 가족 개개인이 권리를 인정받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가족 개개인이 권리를 인정받는 시대 열려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 법원의 허가를 얻어 새 아버지 성을 따를 수 있게 되고, 이혼 후 재혼을 하지 않는 경우 어머니 성을 따를 수도 있게 된다. 동성동본 금혼 규정이 삭제되고 8촌 이내의 근친결혼만 금지되어, 결혼의 자유와 권리도 크게 신장된다. 친양자 제도가 도입되어 양자를 양부모 친생자로 신분등록부에 기재할 수 있고, 성도 양부모 성을 따를 수 있게 된다.
아들 손자 딸 아내 며느리 순으로 돼 있는 현행 민법의 호주 승계순위는 호주제도의 여성인권 제약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아들과 손자가 없는 경우에만 딸 차례가 오고, 그나마 아내는 딸 다음인 여성대접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성을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성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 발상은, 양반이 아니면 벼슬을 할 수 없었던 지난날의 반상(班常) 차별제도와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
현행 민법의 이런 인권침해 요소들 때문에 우리 정부는 유엔 인권이사회로부터 호주제도 폐지를 공식적으로 권고 받았다. 인권위원회가 호주제의 위헌의견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하고, 헌법재판소가 지난 달 호주제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도 다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헌재는 호주제를 ‘성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에 기초한 차별’로 규정하고, 호주승계 순위, 혼인시의 신분관계, 자녀의 신분관계 형성에 미치는 영향 등을 들어 남녀를 차별하는 제도라고 단정했다. 양성평등과 혼인의 남녀동권을 결혼의 기초질서로 선언한 헌법정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는 호주제도의 폐해로 인한 갈등과 불행이 큰 문제가 되어 있다. “왜 나는 아버지와 성이 다르냐”고 묻는 아이의 물음에 말문이 막힌 재혼여성들의 고민은 이민과 허위 실종신고 같은 기막힌 현상으로 나타난다. 오죽하면 호주제도가 없는 나라를 찾아갈까. 아이에게 새 아버지 성을 부여하기 위해 허위로 아이의 실종을 신고한 뒤에 출생신고를 하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진다.

경로효친같은 전통적 도덕률 손상되지 않도록 법규 정비해야
이런 일은 이제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이혼율이 높아질수록, 재혼이 허물이 아닌 세상일수록 이런 불행은 보편화 된다. 호주제 폐지가 너무 늦었다는 것은 그런 ‘강요된 불행’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내용은 넓어진 가족의 범위가 초래할 의식과 관념의 변화다. 현행법은 가족의 범위를 호주의 배우자, 혈족과 그 배우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비해 개정안은 배우자와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생계를 같이 하는 직계혈족의 형제자매까지 가족으로 규정한다. 같이 사는 경우라면 장인 장모 사위 처남 처제까지 가족이 된다.
이런 중요한 변화들이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관념과 개념의 혼란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가족제도의 해체를 걱정하는 호주제 옹호론자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숭조(崇祖)사상과 경로효친 같은 전통적인 도덕률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정부는 세심하게 관련 법규를 정비해주기 바란다.

문 창 재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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