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이(46) 독자는 지금 전업주부로 조용히 지내고 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그는 전북지역 노동운동계의 대표적 여장부로 꼽혔다.
그는 “지금은 아무런 일도 맡고 있지 않지만 내가 해야할 일이라면 반드시 하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생활하고 있다”고 최근 근황을 전했다.
주부로서의 일상에 내일신문 읽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박 독자는 “창간당시 다들 신문은 어렵다고들 했는데 10년을 넘은 세월을 버티면서 신문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면서 “내일신문 사람들 정신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혀를 내둘렀다.
독일계 패션업체인 후레어패션 노동조합 위원장으로서 그는 수년에 걸친 노동조합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 어려웠던 투쟁을 석탑노동연구소와 함께 하면서 이후 내일신문 주주독자로 이어질 인연도 맺었다.
79년도에 회사에 입사한 그는 87년도 노동자대투쟁 이후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해고와 복직을 거듭하고 88년에는 민주화된 후레어패션 노조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88년도에 치러진 그의 결혼식은 단연 화제거리였다. 남편은 당시 산업재해나 부당해고 등 노동관계 법률상담을 전담하고 있던 노동교육연구소의 박두술 소장. 그야말로 ‘투쟁으로 하나된’부부였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이 화제가 된 것은 만남 자체만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리 보기 힘든 결합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이 전투경찰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후레어 노조 파업현장에서 치러진 것이다.
박 독자는 “결혼 날짜는 잡아놨는데, 아직 파업투쟁은 계속되고 있고 장기간의 싸움에 조합원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며 “지친 조합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결혼식을 이벤트로 만들어 파업현장에서 열었다”고 회고했다. 그 결혼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힘을 얻었다.
건강이 안좋아 고생하던 차에 회사가 중국시장을 노리고 임금이 싼 스리랑카 쪽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그해 95년도에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 역할을 하게 됐다. 하지만 집에 숨어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파트 부녀회 일을 하고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 전북지회장을 맡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지냈다.
그는 “내일신문이 나온 후로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읽고 있다”며 “때로는 못마땅하고 견해가 다르더라도 ‘그저 다른갑다’하고 읽는다”고 말했다. 내일신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판단을 유보하고 지켜볼만한 믿음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독자는 내일신문이 오늘과는 다른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 내일 신문에 걸어왔던 기대가 너무 커서일까.
그는 “튀는 세상에 비해 내일신문다운 참신함이나 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창간시에 가졌던 그 열정이 그립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정치경제 일간지라고 해도 특별한 정보를 준다거나 크게 볼거리가 없고 조간과 중복되는 기사가 많이 보인다”며 “다른 신문과는 달리 내일신문만이 가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드러나는 재미있는 기사가 많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박정미 기자 pjm@naeil.com
이 란은 독자여러분께 열려있는 공간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담당 : 박정미 기자 보낼곳 : pjm@naeil.com
그는 “지금은 아무런 일도 맡고 있지 않지만 내가 해야할 일이라면 반드시 하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생활하고 있다”고 최근 근황을 전했다.
주부로서의 일상에 내일신문 읽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박 독자는 “창간당시 다들 신문은 어렵다고들 했는데 10년을 넘은 세월을 버티면서 신문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면서 “내일신문 사람들 정신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혀를 내둘렀다.
독일계 패션업체인 후레어패션 노동조합 위원장으로서 그는 수년에 걸친 노동조합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 어려웠던 투쟁을 석탑노동연구소와 함께 하면서 이후 내일신문 주주독자로 이어질 인연도 맺었다.
79년도에 회사에 입사한 그는 87년도 노동자대투쟁 이후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해고와 복직을 거듭하고 88년에는 민주화된 후레어패션 노조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88년도에 치러진 그의 결혼식은 단연 화제거리였다. 남편은 당시 산업재해나 부당해고 등 노동관계 법률상담을 전담하고 있던 노동교육연구소의 박두술 소장. 그야말로 ‘투쟁으로 하나된’부부였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이 화제가 된 것은 만남 자체만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리 보기 힘든 결합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이 전투경찰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후레어 노조 파업현장에서 치러진 것이다.
박 독자는 “결혼 날짜는 잡아놨는데, 아직 파업투쟁은 계속되고 있고 장기간의 싸움에 조합원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며 “지친 조합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결혼식을 이벤트로 만들어 파업현장에서 열었다”고 회고했다. 그 결혼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힘을 얻었다.
건강이 안좋아 고생하던 차에 회사가 중국시장을 노리고 임금이 싼 스리랑카 쪽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그해 95년도에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 역할을 하게 됐다. 하지만 집에 숨어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파트 부녀회 일을 하고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 전북지회장을 맡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지냈다.
그는 “내일신문이 나온 후로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읽고 있다”며 “때로는 못마땅하고 견해가 다르더라도 ‘그저 다른갑다’하고 읽는다”고 말했다. 내일신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판단을 유보하고 지켜볼만한 믿음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독자는 내일신문이 오늘과는 다른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 내일 신문에 걸어왔던 기대가 너무 커서일까.
그는 “튀는 세상에 비해 내일신문다운 참신함이나 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창간시에 가졌던 그 열정이 그립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정치경제 일간지라고 해도 특별한 정보를 준다거나 크게 볼거리가 없고 조간과 중복되는 기사가 많이 보인다”며 “다른 신문과는 달리 내일신문만이 가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드러나는 재미있는 기사가 많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박정미 기자 pjm@naeil.com
이 란은 독자여러분께 열려있는 공간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담당 : 박정미 기자 보낼곳 : pjm@naeil.com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