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재조명 작업이 진행되면서 국가와 정권의 폭력에 침해받았던 인권회복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권 사각지대가 적지 않다. 가정폭력에 방치된 국제결혼 이주여성, 경제적 고통과 ‘무능력자’라는 편견까지 받아야 하는 실업자 등은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롭게 제기된 사회문제이자 인권문제다. 또 ''꿈'' 하나만 믿고 부당한 대우를 견뎌야하는 영화제작 스태프, 어디에도 드러내지 못한채 속앓이를 하고 있는 청소년 동성애자들, 괴물 취급을 받으며 유폐된 생활을 하고 있는 안면화상 장애인들은 인권 개념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인권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권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이 더욱 넓어지고 깊어져야 한다. 아직까지 인권 관점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사회계층들을 찾아 이들의 현실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삶이 깡그리 무시당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대학을 마치고 5년간 직장생활을 해오다 지난해부터 실직상태에 있다는 김 모(31)씨. 그는 “직장을 잃고 나니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마케팅부터 시작해 기획 업무와 반도체 관련 일을 했다는 김씨는 그때마다 다니던 회사가 잘못돼 일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백수생활 몇 달이 지나자 주위의 시선이 달라졌고, 어느새 집안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 버렸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백수’라는 꼬리표였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가 안 좋아 새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판에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그의 백수 ‘경력’은 구직활동을 더욱 어렵게 했다. 그는 결국 새 직장 찾기를 포기하고 요즘은 자그마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김씨처럼 뜻하지 않게 직장을 잃거나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실업자들은 경제적 어려움 뿐 아니라 사회적 편견 속에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개발경제시대가 끝나고 구조적으로 실업자가 양산되고 있지만 우리사회에서 실업은 여전히 개인의 문제로 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업자는 ‘무능력자’와 등치되면서 때로는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기도 한다.
◆“낮에는 목욕탕에도 가지마라” = 지난해 대학을 졸업하고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이 모씨(여·26)는 얼마전 어머니에게 “평일 낮에는 목욕탕에 가지 마라”는 소리를 들었다. ‘누구네 둘째 딸은 졸업하고 논다’는 얘기가 동네 아주머니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게 싫다는 이유였다. 이씨는 속으론 분하고 야속하기도 했지만 어머니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이상하게 쳐다보는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생활 3년째를 맞는다는 정태영(30)씨는 “행여 이웃들 눈에라도 띌까 낮에는 동네 돌아다니기도 겁난다”고 말했다.
문제는 ‘백수는 능력이 없거나 무슨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실업자들의 삶을 위축시키고 아예 사회생활의 기반마저 허물어뜨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졸업 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1년이 지났다는 박 모(28)씨는 “친구들을 만나는 비용도 부담스럽지만 ‘뭐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곤혹스럽다”며 “점점 모임에 안나가게 되고 그러다보면 정보에서도 뒤쳐져 사회에서 밀려나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은행원으로 근무하다 그만두고 8년째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 손 모(36)씨는 “은행을 접고 난 직후에는 사람들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듣곤 했는데 지금은 될 수 있으면 사람 만나는 일을 피하고 있다”며 “이런 저런 일을 해서 먹고살 만큼 돈은 모았지만 내세울 직장이 없는 탓에 결혼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여성 실직은 생존의 문제 = 실제 ‘백수’라는 경력은 일자리를 구하는데 큰 장애요인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관계가 적은 탓에 일자리를 소개받기도 힘들고, 어렵게 면접을 봐도 백수에 대해서는 푸대접하는 풍토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실업으로 인한 고통은 여성들일수록 더욱 크다. 1년여간 심리치료사를 하다가 자신도 백수가 됐다는 이은주(여·37)씨는 “상담치료를 받는 여성 중 80%는 실직으로 인한 문제 때문”이라며 “여성들의 경우 30대 직장을 잃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부분 죽느냐 사느냐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이 역시 여성실직자들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얼마 전 회사를 그만 두고 새직장을 알아보고 있는 고 모씨(여·25)는 “겉으로는 나이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류심사때부터 따지는 회사가 많다”며 “여성일수록 나이의 벽이 높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실업은 개인 문제 아닌 사회적 현상 = 통계청이 집계한 실업자 수는 지난해말 현재 84만명. 하지만 구직단념자와 반실업상태에 있는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등을 포함하면 실업자로 분류할 수 있는 인구가 500만명에 달한다는 추산도 있다.
이은주씨는 “15년 이상 교육을 받고도 직장을 갖지 못한 이들이 넘쳐난다면 이는 사회가 잘못한 탓 아니냐”며 “실업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사회적 현상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백수를 동정이나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기전에 안정적인 구직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백수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애야 한다는 게 이들의 요구다.
정태영씨는 “백수 중에는 미래를 준비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단지 일자리가 없단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며 “어떤 선입견 없이 동등한 인격체로 봐달라”고 주문했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삶이 깡그리 무시당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대학을 마치고 5년간 직장생활을 해오다 지난해부터 실직상태에 있다는 김 모(31)씨. 그는 “직장을 잃고 나니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마케팅부터 시작해 기획 업무와 반도체 관련 일을 했다는 김씨는 그때마다 다니던 회사가 잘못돼 일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백수생활 몇 달이 지나자 주위의 시선이 달라졌고, 어느새 집안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 버렸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백수’라는 꼬리표였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가 안 좋아 새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판에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그의 백수 ‘경력’은 구직활동을 더욱 어렵게 했다. 그는 결국 새 직장 찾기를 포기하고 요즘은 자그마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김씨처럼 뜻하지 않게 직장을 잃거나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실업자들은 경제적 어려움 뿐 아니라 사회적 편견 속에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개발경제시대가 끝나고 구조적으로 실업자가 양산되고 있지만 우리사회에서 실업은 여전히 개인의 문제로 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업자는 ‘무능력자’와 등치되면서 때로는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기도 한다.
◆“낮에는 목욕탕에도 가지마라” = 지난해 대학을 졸업하고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이 모씨(여·26)는 얼마전 어머니에게 “평일 낮에는 목욕탕에 가지 마라”는 소리를 들었다. ‘누구네 둘째 딸은 졸업하고 논다’는 얘기가 동네 아주머니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게 싫다는 이유였다. 이씨는 속으론 분하고 야속하기도 했지만 어머니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이상하게 쳐다보는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생활 3년째를 맞는다는 정태영(30)씨는 “행여 이웃들 눈에라도 띌까 낮에는 동네 돌아다니기도 겁난다”고 말했다.
문제는 ‘백수는 능력이 없거나 무슨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실업자들의 삶을 위축시키고 아예 사회생활의 기반마저 허물어뜨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졸업 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1년이 지났다는 박 모(28)씨는 “친구들을 만나는 비용도 부담스럽지만 ‘뭐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곤혹스럽다”며 “점점 모임에 안나가게 되고 그러다보면 정보에서도 뒤쳐져 사회에서 밀려나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은행원으로 근무하다 그만두고 8년째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 손 모(36)씨는 “은행을 접고 난 직후에는 사람들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듣곤 했는데 지금은 될 수 있으면 사람 만나는 일을 피하고 있다”며 “이런 저런 일을 해서 먹고살 만큼 돈은 모았지만 내세울 직장이 없는 탓에 결혼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여성 실직은 생존의 문제 = 실제 ‘백수’라는 경력은 일자리를 구하는데 큰 장애요인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관계가 적은 탓에 일자리를 소개받기도 힘들고, 어렵게 면접을 봐도 백수에 대해서는 푸대접하는 풍토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실업으로 인한 고통은 여성들일수록 더욱 크다. 1년여간 심리치료사를 하다가 자신도 백수가 됐다는 이은주(여·37)씨는 “상담치료를 받는 여성 중 80%는 실직으로 인한 문제 때문”이라며 “여성들의 경우 30대 직장을 잃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부분 죽느냐 사느냐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이 역시 여성실직자들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얼마 전 회사를 그만 두고 새직장을 알아보고 있는 고 모씨(여·25)는 “겉으로는 나이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류심사때부터 따지는 회사가 많다”며 “여성일수록 나이의 벽이 높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실업은 개인 문제 아닌 사회적 현상 = 통계청이 집계한 실업자 수는 지난해말 현재 84만명. 하지만 구직단념자와 반실업상태에 있는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등을 포함하면 실업자로 분류할 수 있는 인구가 500만명에 달한다는 추산도 있다.
이은주씨는 “15년 이상 교육을 받고도 직장을 갖지 못한 이들이 넘쳐난다면 이는 사회가 잘못한 탓 아니냐”며 “실업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사회적 현상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백수를 동정이나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기전에 안정적인 구직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백수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애야 한다는 게 이들의 요구다.
정태영씨는 “백수 중에는 미래를 준비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단지 일자리가 없단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며 “어떤 선입견 없이 동등한 인격체로 봐달라”고 주문했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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