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스승’ 그들의 ‘모델’] ① 박근혜 대표와 엘리자베스 1세
고난에 담금질한 리더십 닮아갈까
지역내일
2005-01-21
(수정 2005-01-21 오전 10:55:03)
누구나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을 만한 사람을 가슴에 안고 있기 마련이다. 누구를 스승과 모델로 삼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나라를 이끄는 리더인 정치인들은 어떤 모델을 가슴 속에 안고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스승 또는 모델과 본인들의 닮은 점과 차이점을 비교해보고, 배울 점은 없는지 짚어본다.
/편집자 주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표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상적 여성 리더를 묻는 질문에 주저 없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를 꼽았다.
박 대표는 “(엘리자베스 1세는) 어려서 고생을 많이 했다. 음모도 있었지만 잘 참아내 사려 깊은 지도자가 됐다. 자기가 겪어 봤기 때문에 남을 배려할 줄 알았다. 늘 관용의 정신을 갖고 합리적으로 하려고 했기 때문에 국민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대영제국을 만들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박 대표 서재에도 ‘위대한 CEO 엘리자베스 1세’ 등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책이 여러 권 꽂혀 있다.
실제 박 대표측에서도 박 대표의 모델로 엘리자베스 1세와 영국 대처 수상을 꼽는다. 박 대표를 지지하는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한국사에서는 선덕여왕을 박 대표에 비교하고, 서양사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를 비교한다.
◆‘닮은꼴’ 개인사=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훌륭한 여왕으로 평가받지만 개인사적으로는 불운한 여인이었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앤 볼린에게서 아들을 얻고 싶어 본처인 스페인 공주 캐서린과 억지로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한다. 그 여파로 로마의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하고 영국은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하여 국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앤 볼린이 낳은 것은 딸 하나, 엘리자베스 공주 뿐. 그는 앤 볼린을 간통죄로 몰아 왕비가 된지 3년 만에 죽인다. 그 후 엘리자베스는 배다른 언니인 메리 공주와 또 다른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 왕자 사이에서 불행하고 조심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메리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더욱 가시밭길과 같은 길을 걷는다. 아버지 아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영국 국교회의 신자가 됐던 엘리자베스는 메리 여왕 앞에서 구교로 개종할 것을 엄숙히 다짐한다. 또 반란 음모에 연루돼 생모가 처형당했던 런던탑에 약 4년간 유폐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엘리자베스 1세의 인생스토리를 보면 외면적으로 박 대표와 닮은 점이 꽤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절대군주로 왕권을 확실히 다진 헨리 8세의 딸이었다면 박 대표는 권위주의적 권력을 추구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 또 둘 다 미혼을 고수했고, 둘 다 정치적 감금기를 거쳤다. 박 대표는 박 전 대통령 피살 이후 97년까지 숨죽이며 살았다. 엘리자베스 1세의 리더십이 바로 이런 고난을 모태로 삼았던 것처럼 박 대표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경험과 정치적 감금기는 그의 리더십을 담금질하는 계기가 됐다.
◆‘과거를 벗은’ 리더십= 엘리자베스 1세가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그의 치세 45년 동안 영국이라는 나라를 그 전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바꿔놨기 때문이다. 1558년 메리 1세의 서거와 더불어 25살의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할 당시만 해도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뒤쳐진 후진국이었고 정치적 상황도 혼란스러웠다. 스코틀랜드와의 갈등, 에스파냐 및 프랑스와의 대립 등으로 동맹을 맺을 만한 대상도 없을 만큼 고립 상태였다.
재정적으로도 어려웠다. 막대한 빚에 시달린 나머지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고, 화폐가치 하락과 급격한 인플레이션은 나라 재정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신구교 간의 종교대립으로 혼란이 극에 달해 나라는 그야말로 파산 직전이었다.그러나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45년간의 치세를 마치고 서거했을 때, 영국은 파산 직전의 나라에서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위대한 리더십이 깔려 있다. 리더십의 핵심은 과거에 매달리거나 하지 않고 미래로 향했다는 점이다. 그는 여왕에 즉위한 후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를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오로지 영국의 미래비전만을 외쳤다. 또 여성으로서의 감수성과 강인함이라는 균형감각을 가진 조화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문제일수록 원칙을 고수했고 정면승부를 했다.
박 대표도 상당 부분 엘리자베스 1세의 리더십을 닮아가려는 것이 엿보인다. 박 대표는 항상 미래를 강조하는가 하면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이미지와 함께 강인한 남성적 리더십을 함께 보여주려는 노력도 보인다. 지난 국가보안법 협상 때 박 대표가 보여줬던 모습은 한편으로는 ‘고집불통’으로 비판받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원칙고수’의 강한 리더십을 느끼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 대표 주위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1세를 따라가려면 한참 남았다고 말한다. 박 대표가 아직 ‘홀로서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 즉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 대표를 보좌한 바 있는 한 인사는 “정수장학회 문제를 처리할 때 국민들은 박 대표가 아직 박 전 대통령의 딸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면서 “엘리자베스 1세가 어려운 시절을 겪은 후에도 ‘자기’를 회복했던 것처럼 박 대표도 지금까지의 자기 한계를 벗고 본래의 자기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엘리자베스 1세 못지 않은 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0일 박 대표는 “박근혜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을 잊어달라”고 말한 것은 박 대표가 그 전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 대표는 이날 “문서 공개에 대해 공당으로서, 공당 대표로서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나에게 부담을 갖거나 염두에 두지 말라”고 당 지도부에 주문했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편집자 주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표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상적 여성 리더를 묻는 질문에 주저 없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를 꼽았다.
박 대표는 “(엘리자베스 1세는) 어려서 고생을 많이 했다. 음모도 있었지만 잘 참아내 사려 깊은 지도자가 됐다. 자기가 겪어 봤기 때문에 남을 배려할 줄 알았다. 늘 관용의 정신을 갖고 합리적으로 하려고 했기 때문에 국민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대영제국을 만들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박 대표 서재에도 ‘위대한 CEO 엘리자베스 1세’ 등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책이 여러 권 꽂혀 있다.
실제 박 대표측에서도 박 대표의 모델로 엘리자베스 1세와 영국 대처 수상을 꼽는다. 박 대표를 지지하는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한국사에서는 선덕여왕을 박 대표에 비교하고, 서양사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를 비교한다.
◆‘닮은꼴’ 개인사=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훌륭한 여왕으로 평가받지만 개인사적으로는 불운한 여인이었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앤 볼린에게서 아들을 얻고 싶어 본처인 스페인 공주 캐서린과 억지로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한다. 그 여파로 로마의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하고 영국은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하여 국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앤 볼린이 낳은 것은 딸 하나, 엘리자베스 공주 뿐. 그는 앤 볼린을 간통죄로 몰아 왕비가 된지 3년 만에 죽인다. 그 후 엘리자베스는 배다른 언니인 메리 공주와 또 다른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 왕자 사이에서 불행하고 조심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메리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더욱 가시밭길과 같은 길을 걷는다. 아버지 아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영국 국교회의 신자가 됐던 엘리자베스는 메리 여왕 앞에서 구교로 개종할 것을 엄숙히 다짐한다. 또 반란 음모에 연루돼 생모가 처형당했던 런던탑에 약 4년간 유폐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엘리자베스 1세의 인생스토리를 보면 외면적으로 박 대표와 닮은 점이 꽤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절대군주로 왕권을 확실히 다진 헨리 8세의 딸이었다면 박 대표는 권위주의적 권력을 추구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 또 둘 다 미혼을 고수했고, 둘 다 정치적 감금기를 거쳤다. 박 대표는 박 전 대통령 피살 이후 97년까지 숨죽이며 살았다. 엘리자베스 1세의 리더십이 바로 이런 고난을 모태로 삼았던 것처럼 박 대표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경험과 정치적 감금기는 그의 리더십을 담금질하는 계기가 됐다.
◆‘과거를 벗은’ 리더십= 엘리자베스 1세가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그의 치세 45년 동안 영국이라는 나라를 그 전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바꿔놨기 때문이다. 1558년 메리 1세의 서거와 더불어 25살의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할 당시만 해도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뒤쳐진 후진국이었고 정치적 상황도 혼란스러웠다. 스코틀랜드와의 갈등, 에스파냐 및 프랑스와의 대립 등으로 동맹을 맺을 만한 대상도 없을 만큼 고립 상태였다.
재정적으로도 어려웠다. 막대한 빚에 시달린 나머지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고, 화폐가치 하락과 급격한 인플레이션은 나라 재정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신구교 간의 종교대립으로 혼란이 극에 달해 나라는 그야말로 파산 직전이었다.그러나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45년간의 치세를 마치고 서거했을 때, 영국은 파산 직전의 나라에서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위대한 리더십이 깔려 있다. 리더십의 핵심은 과거에 매달리거나 하지 않고 미래로 향했다는 점이다. 그는 여왕에 즉위한 후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를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오로지 영국의 미래비전만을 외쳤다. 또 여성으로서의 감수성과 강인함이라는 균형감각을 가진 조화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문제일수록 원칙을 고수했고 정면승부를 했다.
박 대표도 상당 부분 엘리자베스 1세의 리더십을 닮아가려는 것이 엿보인다. 박 대표는 항상 미래를 강조하는가 하면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이미지와 함께 강인한 남성적 리더십을 함께 보여주려는 노력도 보인다. 지난 국가보안법 협상 때 박 대표가 보여줬던 모습은 한편으로는 ‘고집불통’으로 비판받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원칙고수’의 강한 리더십을 느끼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 대표 주위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1세를 따라가려면 한참 남았다고 말한다. 박 대표가 아직 ‘홀로서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 즉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 대표를 보좌한 바 있는 한 인사는 “정수장학회 문제를 처리할 때 국민들은 박 대표가 아직 박 전 대통령의 딸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면서 “엘리자베스 1세가 어려운 시절을 겪은 후에도 ‘자기’를 회복했던 것처럼 박 대표도 지금까지의 자기 한계를 벗고 본래의 자기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엘리자베스 1세 못지 않은 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0일 박 대표는 “박근혜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을 잊어달라”고 말한 것은 박 대표가 그 전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 대표는 이날 “문서 공개에 대해 공당으로서, 공당 대표로서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나에게 부담을 갖거나 염두에 두지 말라”고 당 지도부에 주문했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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