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⑧ 동서산업 이천공장의 ‘자격증 전도사’ 이화선씨

“이렇게 살아남은 것이 가장 큰 자랑입니다”

지역내일 2005-01-05
“제가요, IMF 때……” 언제부턴가 인생역정을 털어놓는 장년층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IMF 사태’는 나라의 경제뿐만 아니라 이 땅 수많은 사람들의 개인사에도 지울 수 없는 단층과 굴곡을 남긴 ‘역사적 사건’이었다.
올해 57세가 되는, 동서산업 이천공장 환경공무팀장 이회산씨에게도 ‘IMF 사태’는 아찔한 기억이다. 동서산업은 타일과 위생도기, 콘크리트 파일을 생산하는 업체로서 현대그룹의 방계 계열사였다. 그러나 ‘재벌그룹의 방계 회사’라는 ‘떡고물’ 입지는 IMF 라는 태풍 앞에서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회사는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콘크리트 파일을 생산하는 이천공장에는 당시 100여명이 근무했는데, 그중 삼분의 일이 퇴출되었다. 이회산씨는 나이로 보면 퇴출 1순위였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다. “이렇게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자랑이다.
“1인 다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선임된 역할이 환경기사, 보일러 산업기사, 방화관리 1급, 가스 산업기사, 위험물 관리, 이렇게 다섯 개였습니다. 대체하기가 쉽지 않은 인력이었죠. 수질, 대기, 비산먼지 등등 환경관련 업무가 무척 까다로워져서 여러 기관에서 수시로 검열을 나오는데 경험자가 꼭 필요하죠.”
‘IMF 생존자’인 그는 만 55세가 되던 작년 8월에 정년을 맞았다. 그러나 회사에서 연장근무를 제안해, 1년 계약으로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공장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보일러실을 진지 삼아 사무실이며 생산라인을 20대처럼 경쾌하게 사뿐사뿐 누비고 다니는 그를 보면 이천공장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1년에 하나씩 16개의 자격증 취득
이회산씨는 모두 16개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최초로 딴 자격증은 제관기능사 자격증으로 77년 사우디로 돈 벌러 가기 전에 땄다. 사우디에서 2년간 일해 돈을 좀 모았으나, 결혼한 지 1년밖에 안 된 아내와 갓난쟁이 아들을 두고 이국으로 떠나 번 그 피 같은 돈을 그는 허망하게 날려버렸다. 친구 소개로 조그만 신발 공장을 동업했다가 실패한 것이다. 그 뒤 몇 년간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다 동서산업에 입사한 것이 84년, 그리고 그때부터 1년에 하나 꼴로 차근차근 업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각종 자격증을 땄다. 건축배관, 전기용접, 공조냉동, 보일러 시공, 위험물관리…. “일을 제대로 하려면 공부가 필요했고, 공부하다 보니 더 알고 싶은 게 생겨나고, 하나씩 따는 데 재미가 붙고, 또 당장 필요치는 않아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좋은 것, 유익한 것을 알게 되면 주변에 그런 걸 열성적으로 알리는 ‘전도사’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회산씨가 딱 그런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자격증을 따는 데 만족치 않고 회사 후배들을 들쑤셔 자격증을 따게 했다. “내가 아는 건 다 가르쳐주죠. 후배들이 내 수준으로 올라오기 전에 나는 더 어려운 거 하면 되니까.” 덕분에 다른 회사로 옮겨 간 후배들에게서 “고맙다”는 인사도 많이 들었다.

아들에게 미안해 술꾼 생활 청산
그런데 이회산씨가 그처럼 열심히 자격증 따기 공부를 한 데는 뜻밖의 강력한 동기가 또 하나 있었다. “술을 덜 마시기 위해서”였다.
“집중력이 강해서 그나마 공부할 땐 술을 안 마시니까”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다. 사우디에서 돌아와 실패한 뒤로 그는 “술을 엄청나게 퍼먹었다.” “술 먹고 매너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반드시 실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 한 마디로 간단히 요약하지만, “내가 붙잡아주지 않으면 폐인이 되겠구나 싶어서 속 썩어도 떠나지 못했다”는 아내의 말로 미루어 저간의 상황이 짐작이 된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다. “제가 슬하에 아들 하나뿐입니다. 애비가 술꾼인데도 걔는 참 반듯하게 잘 자랐어요. 4년전, 걔가 군대 있을 땐데 1월 1일날 면회를 갔어요. 면회를 마치고 걔가 돌아서 가는데, 그 뒷모습이 그렇게 쓸쓸해 뵐 수가 없어요. 생각하니 ‘왜 좀 더 나은 애비가 되지 못했나’ 참 미안하더라구요.” 그날로 술 끊겠다고 선언을 했다. 아내도 아들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그는 “술 있는 자리는 무조건 피하고, 사람도 피하고”, 밥을 제대로 못 먹어 살이 10킬로그램 이상 빠지는 금단증상도 이겨내고 술을 끊었다.
아들 뒷모습을 말할 때의 애틋한 표정, 또 그 아들이 방송사 프로듀서임을 말할 때 어리는 자랑스러움을 보니 비로소 그가 ‘아버지 세대’라는 게 체감이 된다.

남보다 나아야 살아남아
동서산업 이천지점의 출근 시간은 아침 8시이다. 그러나 이회산씨는 6시 30분에 늘 1등으로 출근한다. 에너지를 공급하는 일을 맡고 있기 때문에 “생산라인이 잘 돌아가게 하려면 미리 나가서 준비를 해야 하고”, 정년을 넘겨 연장근무를 하고 있는 형편상 “무언가 남보다 나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7시에 퇴근을 하면 차를 몰고 아내가 운영하는 미용실로 가 아내의 일이 마무리되길 기다려 함께 집으로 간다. 아내 진영숙씨는 19년째 한 자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미용기술 배운 것이 남편 “덕분”이라고 웃었다. “술 마시느라 월급도 제대로 안 갖다 주는 남편을 믿고서 앞으로 어찌 살겠나 싶어 배웠다”는 뜻이다. 아내가 남편의 술 이력을 “인생이 뜻대로 안 풀리니까, 형편이 어려워 가진 재주를 성에 차게 펼치지 못하니까 몸부림을 친 것”이라고 해석해 주자, 이회산씨는 “그런 건 다 핑계고, 내가 못나서 그런 것이었을 뿐”이라고 단호히 머리를 젓는 것으로 아내의 ‘아량’에 응답했다. 그러다 예의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아내의 동의를 구하듯 이렇게 슬쩍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과거야 어쨌든, 현재가 중요한 거 아닌가요?”

아들 장가보낸 뒤 실컷 공부해 볼 것
아무리 ‘명랑 쾌활 50대’라지만 왜 그에게 근심이 없겠는가. “저는 ‘주 5일제’ 이야기 들으면 남의 나라 일 같아요. 꿈같은 이야기에요. 당장 우리 회사도 토요일까지 매일 11시간 근무하고, 한 달에 한두 번은 일요일에도 정비하러 나가야 합니다. 우리 공장 80명 중에 17명 빼고는 전부 비정규직이에요. 비정규직은 하는 일은 예전과 같은데 급여 수준은 옛날의 절반입니다.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어려운 사람들은 정말 더 어려워졌어요. 저도 앞으로 8개월 뒤면 계약이 끝나는데, 그 뒤엔 어떻게 될지 모르죠. 아무리 기술이 있다지만 나이 든 사람을 오라고 할 데가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그는 현장의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속으로 미안한 생각이 든단다. 또 “인건비가 덜 드는 젊은 사람을 채용해 기술을 익히게 하는 것이 회사 입장에선 장기적으로 낫고, 그런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그는 나이로 인한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자격증 개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실 기능사 자격증은 맘만 먹으면 40개까지도 딸 수 있어요. 기능사, 산업기사, 기사, 기술사로 자신의 수준을 계속 업그레이드시켜 나가는 게 중요한데, 최고라 할 수 있는 기술사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요. 이 나이에 시작해서는 어려워요.” 세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 탓에 그는 형님과 형수님 밑에서 자랐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렵게 전문대를 마치긴 했지만 ‘성에 차게’ 공부를 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꿈은 “실컷 공부 한번 해 보는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들 결혼시키고 나면 대학엘 갈 생각입니다. 대학원까지도 가고 싶어요. 제가 뭘 한다 하면 날이 새는지 밤이 새는지 모르고 하거든요.”
그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실시하는 기능사 시험의 8개 분야 실기 감독관으로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감독을 하러 간다. 동시에 올해 소방설비 기사 및 산업기사 실기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이기도 하다.
“첫째, 자기를 향상시킬 수 있다, 나이 든 사람은 치매도 예방된다, 둘째, 공부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아이들에게 모범이 된다, 셋째, 남이 인정해준다, 넷째, 남에게 유익한 것을 가르쳐 주고 남을 배려할 수 있다, 다섯째,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 여섯째, 술, 담배 끊게 된다. 개인적 경험으론 만사형통이다.”
오늘도 그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게 왜 좋은지 열심히 ‘전도’를 한다. 과연 자격증이 만사형통에 이르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경험 많은 이 열렬한 ‘전도사’를 예순도 되기 전에 현장에서 퇴출시킨다면, 그 사회는 올바르지도 실리적이지도 않은 사회라는 것이다.

/글 유시주·사진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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