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임수경 방북사건 ‘간첩’으로 엮여 10년간 고국에 못 왔던 어수갑 씨

“이제 이데올로기의 수갑을 풀어주오”

지역내일 2004-12-16
‘얼굴이 희고 안경을 낀 지적인 스타일의 미남형’. 출판기념회 직전 만난 어수갑씨는 20대 후반에 한국을 떠났다 돌아와 거의 20년만에 만난 친구들로부터 젊어보인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외국에서 오래 살면 시간이 정지되는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애늙은이’가 아닌 ‘늙은 애’랄까. 그건 뿌리 뽑혀서 살아가는 해외동포들이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봤지요.”
그는 인터뷰 내내 ‘뿌리 뽑혔다’는 표현을 많이 썼다. 해외에서의 삶은 뿌리가 뽑히거나 가지가 절단되어 제 몸을 통해 여과된 수액을 빨아들이지 못하고 잘라진 부분으로부터 거칠고 생경한 물을 받아들이는 식물과 다를 게 없다는 말도 했다.
1989년 북한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석하러 가는 길이던 임수경을 동베를린 공항에서 ‘받아’ 집에 데려가 된장찌개, 깍두기에 밥을 차려주고 옷가지를 챙겨 다시 공항에 데려다주기까지 같이 한 4시간. 그 4시간은 그의 뿌리를 강제로 들어내고 삶을 통째 뒤흔들어놓고 생각도 못했던 오랜 기간 동안 외국 땅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그를 묶어놓은 족쇄가 됐다. 안기부는 그가 반국가단체 주요 종사자이며 간첩보다 한 수 위인 ‘공작원’이라고 발표했다.
기소중지 상태의 간첩으로 고국 땅에 돌아올 수 없었던 동안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남산에 끌려가 모진 수모를 당한 끝에 심장병을 얻으셨다. 그 와중에 혼기를 놓친 여동생은 지난봄에야 마흔 넘은 나이에 결혼했다.
한국에 돌아갈 길이 막히면서 암담해진 미래, 인간에 대한 실망, 고립과 무력감과 좌절로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의 기억은 올해 봄, 소설가 공지영씨가 발표한 <네게 강="" 같은="" 평화="">의 소재가 된 바 있다.
그가 서슴없이 ‘지옥’이었다고 회상하는 시절, 이혼 후 혼자 키우던 초등학생 아들과 베를린의 가장 가난한 동네, 구석진 방 한 칸에서 절망과 외로움을 짓씹으며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 때 그를 살려낸 건 신앙의 힘이었다.
“절망의 나락, 더 이상 내려갈 데 없는 밑바닥까지 가보니 비로소 희망의 물을 다시 길어낼 수 있었습니다.”
운동이라는 틀을 버리고 사회주의 사상이 전제하는 ‘인간에 대한 낙관’을 완전히 털어내자,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보였다. 가톨릭 사회복지단체인 카리타스에 노인 간병인으로 일하러 갔을 때 계약서의 1조항이 유난히 그의 눈을 잡아끌었다. ‘이웃 사랑에 대한 확실한 신념과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볼품없이 쭈그러든 몸을 씻어주고 아무리 아파도 낮에는 깨끗한 복장을 하고 싶어 하는 노인들에게 나들이옷을 갖춰 입혀 잠시 동안이나마 의젓한 어른의 모습으로 있게 해주는 일을 6년 동안 계속했다. 그 6년은 허공에 뜬 관념으로 인간과 사회를 이해했던 지식인 시절을 반성하고 현실에서 출발하는 운동과 사회 변혁에 대해 눈떴던 시기였다.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세상이 바뀌어지는 것이라는 깨달음, 인간의 남루하고 결함투성이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게 된 변화가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동안 “평범하지만 오직 하나 가진 장점은 착한 사람”인 아내 ‘들몰댁’을 만나 오순도순 살가운 가정도 꾸렸고 아들은 올해 가을에 대학에 입학했다. “한국을 떠나있었던 18년간의 부재증명, 상처와 치유의 기록”이라고 말하는 책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를 통해 그는 이제 과거의 기록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했다.
출판기념회 다음 날 그는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빠른 시일 안에 돌아와 한국 땅에 뿌리내리고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열어가겠다는 약속을 남겨둔 채.

/오진영 기자 ojy@naeil.com | 사진 이의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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