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엔 뷰>신촌의 노을을 본 적이 있나요

함 인 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지역내일 2004-12-08
또 한 해를 속절없이 보내자니, 불현듯 신촌의 노을이 그리워진다. 새삼 그리움이 고개를 드는 데는 다 까닭이 있다. 신촌의 노을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유유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 지금은 기억조차 아련한 옛사랑의 추억을 한 번쯤은 떠올려 보며 피식 웃을 수 있었던 곳. 그 곳 이화교에서 바라보던 노을은 초라하기에 오히려 정겨운 신촌역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한 편의 풍경화였다. 그런데 요즘 이화교는 복개공사가 한창이다.
예전 이대생들은 이화교 아래를 지나는 기차 꼬리를 밟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덕분에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기차를 만나려 잰 걸음을 치곤했다. 그럴 때마다 선배들 왈, “뛰어가서 억지로 기차 꼬리를 밟는 건 무효란다. 행운이란 우연히 오는 것이거든” 그랬었는데….
미팅 자리에 나온 서울대생이 “우리 학교는 캠퍼스가 어찌나 넓은지 시내버스들이 다닌다” 자랑하자, 이를 받은 이대생이 “어머 그러세요. 우리 학교는 기차가 들어오는데” 했다던가. 하지만 요즘 학생들이야 공사판 먼지에, 자동차 소음에, 발 디딜 틈 없는 인파에, 호객하는 상인에 이화교의 낭만을 기억할리 만무하다.
아쉬움에 학교 후문 쪽으로 발길을 돌리자니, 이곳의 번잡함이 자아내는 삭막함도 만만치가 않다. 드디어 1004개의 병동을 자랑한다는 세브란스 병원 신축 건물이 그 위용을 드러내면서, 신촌의 노을이 소리 없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 탓이다.
봉원동 안산(이화여대에서 연세대로 이어지는 산의 이름이다) 하늘 위로, 때론 성난 불길 번지듯 때론 붉은 수채화 물감 번지듯 하던 장관을 이젠 만날 수 없게 됐다. 가끔 수십 층으로 이어진 병원 유리창에 반사되어 나오는 노을빛은 눈 속으로 꽂혀 들어오기에, 마주하기조차 민망한 ‘무늬만 노을’로 전락한 셈이다.
그래도 역시 대학가는 대학가인지라, 삭막한 공간을 뚫고도 낭만적 이야기가 20대 청춘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우연히 좌석 버스 안에서 옆자리에 앉게 된 이웃학교의 남학생. 왠지 가을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에 그만 첫 눈에 반해버렸단다. 말 한번 붙여 보고픈 마음은 굴뚝같은데, 오늘따라 그렇게 막히던 길은 왜 막히지도 않고 버스는 왜 이리도 빨리 달리는 건지. 이대 후문 정류장에서 내린 후 여전히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려는데, 그 남학생이 “저 여기 있어요” 했다는 이야기. “그 두 사람은 지금도 ‘닭살 커플’이랍니다.” 사족까지 붙어 떠돌아다닌다.
그런 녀석들이건만, 졸업을 앞둔 사(死)학년이 되면 청년실업의 무게에 짓눌려 노을이 지는지 한 해가 가는지 고개를 땅에 떨군 채 취업 재수, 삼수생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또 요즘의 익숙한 대학가 풍경이다.
이제 40대 후반으로 접어들고 보니,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가능성으로 인해 가슴앓이 중인 이 녀석들 보기가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느니, 마음이 급할수록 걸음은 천천히가 좋겠느니, 세상에 가치 있는 것 치고 쉬 공짜로 얻어지는 건 없느니…, 무슨 이야길 들려주어도 연봉 높은 대기업에 취직한 동료가 부럽고 집안 ‘빵빵한’ 남자 만나 결혼한 선배가 부럽고 각종 고시에 합격하여 현수막에 이름 걸린 난사람들이 부러운 시절 아니던가. 20대에게 어찌 40대를 이해시킬 수 있으리요. 40대의 포용력으로 20대의 패기를 품을 밖에.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올릴 생각이다. ‘혹 신촌의 노을을 보신 적이 있는지요…’로 시작되는 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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