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 폐지 근거는 우리 자신”

국회·남영동 대공분실 찾은 국보법 피해자들

지역내일 2004-10-20 (수정 2004-10-20 오후 12:19:53)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그리고 남대문 대공분실은 19일 뜻밖의 방문객을 맞았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징역을 살거나 수배를 받아 온 피해자와 가족들이 국보법 완전폐지를 촉구하기 위해 찾아온 것. 이날 방문행사에 참여했던 30여명의 피해자들은 국보법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자신들의 삶이 국보법을 완전폐지해야하는 근거라고 주장했다.

◆국보법은 태생부터 잘못 = 소기수 민족자주평화통일 중앙회 의장도 그 중 한 사람. 그는 지난 68년 유신반대운동에 나섰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4년간 징역살이를 했다. 옥살이 뒤에도 요시찰 대상으로 ‘찍혀’ 25년여간 감시를 받으며 생활해야했다.
그는 “태생부터 잘못된 국가보안법은 권력자들의 부정부패를 조장하고 민주인사만 골라 탄압하는 법”이라고 잘라 말했다. 해방후 친일파와 민족반역세력들이 일제시대 식민통치를 위해 만들었던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 국가보안법이고, 그래서 권력유지와 탄압 도구로 활용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과거 군사정권은 선거 때만 되면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권력을 유지해왔다”며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이라고 주장했다.
수배중 결혼식을 올려 관심을 모았던 윤기진 범청학련의장(전 한총련의장)의 부인 황 선씨와 어머니 김종숙씨도 함께 했다. 윤씨는 한총련 의장이었던 지난 1999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가입 혐의로 수배를 받아 6년째 도망생활을 하고 있고, 황 선씨는 국보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고 나왔다.
김씨는 “아들이 수배생활을 하고 난 이후 도대체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며 “어렵게 얻은 손주딸과 단란하게 살아보는 게 유일한 꿈”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작은 소망이 이뤄질수 있도록 하루빨리 국보법을 폐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역시 아들이 한총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수배생활을 한지가 10년이 다 돼간다는 이산라씨는 “아들이 수배자가 되고 나서부터 국보법이 얼마나 잘못된 법인지 알게됐다”며 “죄없는 젊은이를 못살게 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말도 안되는 조항으로 얽어매는 법이 악법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분개했다.
이날 참가자 중에는 국보법 위반으로 여섯번이나 실형을 살고, 지금도 계류중에 있는 이천재씨도 있었다. 이 씨는 “일제시대 배속장교가 해방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에 반대했다가 국보법 위반으로 징역을 산 것이 감옥을 드나들게 된 출발점이었다”며 “국가보안법이 없었다면 남들처럼 돈도 벌고, 공부를 하거나 소설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그러면서도 국보법에 의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자신이 겪은 고통은 미비한 편이라고 말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역사박물관으로 = 고문과 탄압의 상징이 돼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는 불법고문에 대한 성토가 이어지기도 했다.
권오헌 국보법 폐지 국민연대 공동대표는 지난 70년대후반 남영동에 끌려와 고문당했던 일을 소개하며 치를 떨었다. 그는 “어찌나 물고문을 세게 당했는지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다 수갑이 끊어진 일도 있었다”며 “그랬더니 다시 로프로 묶어놓고 고문을 하더라”고 말했다.
유신반대 운동에 가담했다가 국보법 위반으로 걸려 남영동에 온 적이 있다는 안재구씨는 당시 ‘해양연구소’라 적혀 있던 간판과 취조실 위치까지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는 “40여일간 갇혀 있으면서 물고문 전기고문 등 안 당해본 것이 없다”며 “치욕스런 남영동 분실을 이제는 박물관으로 보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아직도 남영동 대공분실과 공안요원이 버젓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국가보안법이 건재하기 때문”이라며 “국보법을 완전 폐지해 공안요원들이 멀쩡한 사람을 고문하지 말고 도둑놈을 잡도록 해야한다”고 덧붙였다.

◆국보법 피해는 ‘현재진행형’ = 이날 방문행사에는 한총련 소속 대학생도 참여했다. 한총련 대의원이라는 이유로 2년간 수배생활을 했다는 오선임씨는 “아직도 국보법상 이적단체 가입혐의로 도망생활을 하고 있는 선후배들이 적지 않다”며 “국보법을 없애 이들이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또 “힘든 수배생활과 주위의 강요로 신념을 지키지 못했던 친구들 중에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이들이 많다”며 “이들 또한 국보법의 피해자”라고 말했다.
지난 2002년 국보법 위반혐의로 고초를 겪었던 안덕영씨는 “국보법 7차 개정이후 인권유린사태가 없다는 한나라당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개인은 물론이고 가정의 미래까지 깨뜨리는 국보법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법부 믿을 수 없어 형법보완 반대 = 이날 행사에 참여한 이들은 한결같이 어떠한 보완 없이 국보법을 완전폐지해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악용의 소지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이천재씨는 “그동안 사법부가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조금만 했었더라도 국보법에 의한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형법보완에 반대하는 것도 사법부를 비롯해 법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악용의 소지가 있다면 수구기득권층이 이를 확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형법보완을 해서는 안된다는 설명이었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세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다.
소기수 의장은 최근 보수원로들의 국보법 폐지 반대 움직임에 대해 “국보법 사수를 외치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친일세력이거나 군사정권에서 기득권을 누려왔던 인물들”이라며 “이들은 국보법이 없으면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진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해온 것은 바로 국가보안법이었다”고 말했다.
군 소령 출신인 수배자 가족 최강복씨는 “진짜 국가안보를 흔드는 사람들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라며 “이들은 바로 국가보안법을 등에 업고 권력과 금력을 누려온 기득권층들”이라고 비판했다.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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